언어덕후로 산다는 것
꿈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뭘 해야 할지도 몰랐던 학창시절과는 달리 내 인생은 참 다채로웠다.
외국어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도도한 상대고, 나는 속절없는 그 상대를 10년 넘게 짝사랑하고 있다.
처음 일본어를 배우면서 무언가 간절히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전과도 하고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가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2007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고, 일본에 가게 됐다.
일본 사람들과 성격이 안 맞아 우울했고 외국인들과 마찰도 있었지만,
세상을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최초의 기회였고 일본어만큼은 확실히 늘었다.
친구 A와 졸업여행으로 괌이란 데도 가보고 스킨 스쿠버도 해봤다.
2012년 직장을 때려치우고 첫 유럽 배낭여행을 혼자 갔다.
더 이상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는 건 싫었고, 그동안 모아둔 돈이면 충분했다.
그동안 펜팔로 갈고닦은 실력으로 영어는 무난하게 할 수 있었으니 별로 걱정은 안됐다.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혼자서 보낼까 싶기도 했지만, 사색을 하기엔 딱 좋았다.
펜팔 친구들을 몇 명 만나고 외로우면 호스텔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이 놀기도 했다.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던 파리는 너무도 싫었고,
파리에서 벗어나려고 떠난 근교 여행에서 반 고흐에게 빠졌고,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아비뇽에서 라벤더 향에 흠뻑 젖어보기도 했고,
딱딱하고 지루할 것만 같던 독일은 미치게 좋았다.
스톤헨지에서 만난 훈남 아들을 둘 둔 스페인 아줌마는 헤어질 때 내 손을 잡고 서툰 영어로 안전한 여행을 빌어주었다.
벨기에서 만난 똑똑한 브라질 대학원생은 나를 위해 통역기 노릇을 해야 했다.
뮌헨에서 만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국 남학생은 굶주린 내게 흔쾌히 신라면을 내주었고, 누나 퓌센 꼭 가세요 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해서 결국 아픈 몸을 이끌고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보러 가야 했다.
뭔가 끝내주는 경험을 하고 싶었던 나는 인터라켄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했다.
친구 A와 이탈리아에서 만나 막바지 여행을 함께 했다.
걱정도 두려움도 많았던 여행이었지만, 화장품 파우치를 도둑맞은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친구 B와 여름휴가로 캄보디아에 갔다.
예전부터 7대 불가사의에 묘한 매력을 느낀 나는 휴가를 전부 캄보디아에서 쓰기로 했다.
엄마와 딸, 오래 사귄 커플, 갓난 아이를 둔 젊은 부부와 그 아버지 등 다소 이상한 조합이었지만 모두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가이드 아저씨도 너무 멋지고 좋았다.
한 팀에 모난 사람이 꼭 한 명 정도는 있기 마련인데 다들 갓난 아이와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배려하는 좋은 사람들이라며 가이드 아저씨는 놀라워했다.
비도 조금씩 내려 무덥지 않은 좋은 날씨였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
유적지에 새겨진 오래된 산스크리트어를 보니 너무 가슴이 두근거렸다.
키가 작고 마른 체형에 긴 생머리를 한 내 친구에게 현지인들은 너무 아름답다고 감탄을 했다.
너 여기서 눌러 앉아야겠다.
친한 친구 B, C와 대만에 갔다.
친구 C가 곧 결혼을 하기 때문에 마지막 휴가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그동안 대만 청춘영화를 많이 봐서 실제로 대만에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일을 하면서 공부했던 중국어가 아직 녹슬지 않았으니 대충 의사소통은 될 것 같았다.
여름의 대만은 숨 막힐 정도로 더웠다.
다행히 사람들은 친절하고 음식은 맛있었다.
나는 심한 방향치라서 항상 반대쪽으로 가려고 했기에, 친구는 내게 의견을 제시하라고 했고 그리고 그 반대 방향으로 가자고 했다.
누군가가 왜 방향치/길치들끼리 여행을 가서 로밍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랬다면 이런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까?
2015년 또 직장을 관뒀다. 한번 관두는 게 어렵지 또다시 관두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더 오래 체류할 목적으로 작정하고 오스트리아 워킹홀리데이 비자까지 받았다.
3개월은 오스트리아, 나머지 3개월은 스페인에서 보내기로 했다.
호스텔에서 일을 도와주며 숙식을 해결하기로 했기에 어느 정도 돈은 아낄 수 있었다.
독일어를 할 줄 알면 참 좋았을 텐데 이때는 관심이 없었다. 독일어를 조금 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가 없다.
비엔나에서 나는 조식 시간에 잠깐 일을 도와주는 Helper 수준이었는데도 휴가를 줬다.
덕분에 여행도 맘껏 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에서 아시아인은 나밖에 없는 2 Cellos의 콘서트에 갔고,
플리트비체의 기념품 가게에서 귀여운 독일 여자아이가 내게 다가와 한국인이냐며 수줍게 물어봤다.
폴란드에 사는 친구 집엘 방문했다. 아줌마는 내게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 마음에 들면 데려가라고 했지만, 둘은 쌍둥이라 꼭 닮았기에 고를 수 없었다.
헝가리에 사는 친구와 엄마(Anya)는 나를 진짜 가족처럼 대해줬고, 내가 놀러 갈 때마다 한국에 사는 딸이 온다며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다니셨다.
독일에서는 베를린 친구와 뮌헨 관광버스를 탔고, 네덜란드에서는 잔세스칸스엘 갔다. 걔네들은 현지인인데도 우리는 관광객 놀이를 했다.
일본-오스트리아 혼혈 친구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린츠에서 보냈다. 특별한 크리스마스였다.
터키에 사는 쌍둥이 친구는 새해 연초부터 나를 집에 가둬두고 갖가지 음식과 디저트들로 사육을 시켰는데, 알고 보니 이때 테러 위협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엔 가지 않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콜롬비아와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는, 지금도 빈의 호스텔에서 일하는 이미 독일어도 유창한 친구는 내게 한국어와 스페인어가 적힌 교재가 너무 아름답다고 말해주었고, 한국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스페인어를 배운다는 걸 알고 항상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주었다.
체코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중국어가 유창한 체코 온 금발의 파란 눈을 한 친구는 내가, (그 짧은 시간 동안 겪은 중력의 힘과 피로 때문인지) 일주일 동안 시차를 겪고 있어 라고 말했더니 리셉션 데스크에서 정말 큰소리로 웃었다. 나는 농담을 한 게 아니었는데도.
3개월 뒤 나는 스페인의 그라나다로 갔다. 나는 지쳐 있었고, 돈은 많이 남지 않았다.
이때는 스페인어를 잘 못해서 그라나다에서 살기'만' 했는데도 귀국했을 때 스페인어 선생님은 내게 안달루시아 악센트가 있다며 웃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둘째 날부터 나는 혼자 리셉션을 보게 되었다. 인터넷은 너무 느렸고, 컴퓨터는 스페인어로 되어 있었다. 겨우 기본 회화만 할 줄 아는 내게 너무 큰 미션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미소를 장착하고 있었다, 남자 손님들이 대다수였다. 한 번씩 내게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물어봤다. 한국인은 선택지에 없었다. 볼 때마다 웃고 있으니 내게 왜 그렇게 행복하냐고 했다. 그때 나는 너무 행복했으니까.
함께 일하는 이탈리아인은 종종 스파게티를 만들어줬다. 최고의 스파게티였다. 나는 대신 중국인 마켓에서 재료를 사 와서 볶음밥이나 짜장밥 같은 걸 대충 만들어줬다. 내게 무슨 레스토랑에서 일하다 왔냐고 물어봤다. 아니, 이건 한국인이라면 다 만들 줄 아는 기본적인 요리야.
야간에 일하는 슬로바키아인은 상상도 못할 농담으로 날 즐겁게 해줬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시간이 너무 기다려졌다.
이래저래 일이 좀 있었다. 그 후로 우울하던 내 앞에 19살의 낯선 영국 남자애가 나타났다. 손님이 없어 죽을 만큼 심심했던 나는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했고, 그렇게 거의 한 달을 호스텔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인도 여자애가 찾아왔다. 그때 나는 룸메이트가 없었기에 내 위의 침대는 그 아이의 차지가 됐다. 우크라이나 짐꾼까지 데려온 그 아이는 '우리' 아시아인들의 위대함에 대해 우크라이나인에게 설교했다. 중국인을 빼고는 아시아인이라곤 없는 이곳에서 지친 나는 곧 그 논리에 동조하였고 우리는 밤새도록 수다를 떨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너무도 당당하고 똑똑하던 인도와 영국 국적을 가진 내 특별한 친구는, 마치 엄마처럼 19살의 영국 남자애에게 많은 걸 가르쳐줬다. 우리는 종종 열아홉 살짜리를 놀리곤 했다. 우리 셋은 참 많이도 웃었고, 즐거웠다. 피부색도, 나이도, 언어도 모든 게 달랐지만 환상의 팀이었다. 열아홉 살짜리는 이제 더 이상 열아홉 살이 아니게 되었고 직장도 생긴 모양이지만,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은 지금도 지갑에 넣어 다닌다고 말했다.
거주한 나라 : 일본, 오스트리아 (3개월), 스페인 (3개월)
여행한 나라 : 괌,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캄보디아, 대만, 체코, 크로아티아,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 포르투갈, 터키, 싱가포르, 핀란드 (총 22개국)
왜 외국어가 그렇게 좋아?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참 많지만, 사람이 좋아서 라는 답이 제일 적합할 것 같다.
외국인을 보기가 힘든 지방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영어조차도 쓸 일이 없지만, 펜팔 사이트를 통해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또 여행을 하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외국어' 덕분이기 때문이다.
일본인과는 성격이 너무 많이 달라서 많은 걸 나눌 순 없었지만, 대신 일본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10년 넘게 교제를 이어오고 있다. 또 다른 외국어를 배우고 여행하는 꿈도 가지게 되었다.
그럴수록 더더욱 영어를 잘하고 싶었고, 스페인어나 독일어를 배우는 게 조금은 수월해졌다.
중학교 때부터 미드에 빠져서 드라마도 영화도 수도 없이 봤다.
그러면서 다양한 문화와 생각이 내 안에 들어왔고, 지금 내가 하는 사소한 고민이나 문제 같은 것도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단지 그럴 운명이 아니었던 것뿐이고, 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과거의 불행은 돌아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고 나를 단단하게 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TV를 보지 않기 시작했고, 드라마도 인기 있는 가수도 모른다.
패션엔 관심도 없고 명품 브랜드는 거의 모른다. 그 돈이 있다면 여행을 더 하는 게 낫다고 느꼈다.
내겐 더 중요한 게 많았고 알고 싶은 게 많았고, 내면을 더 가꾸고 싶었다.
대학에 가서부터 특이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외국 친구들은 내가 너무 재미있고 특별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외국어를 정복하기 위한 여정을 계속하게 될 것 같다.
소심하고 겁이 많던 내 인생을 바꾼 건 외국어와도 같으니까.
영어 : 토익 945
일본어 : JPT 930 (한창 공부 열심히 할 때), JLPT 1급
중국어 : HSK 5급 (일할 때 벼락치기 공부, 다 까먹음)
스페인어 : B2~C1 (추정, 중급)
독일어 : A2~B1 (추정, 초급 탈출)
일본어 영상번역 수료, 비즈니스 스페인어 과정 수료, 관광안내 심화교육 수료
동화책 번역 봉사(우수활동), 한일 교류 봉사활동, 드림 워크 14km 걸음 완주
2012년부터 세이브더칠드런 정기후원 중
워드 프로세서 1급, 컴퓨터 활용능력 2급, 상공회의소 한자 3급, 영어독서지도사 1급
사회인이 되면서 특히 더 다사다난했던 인생이지만 그만큼 더 재밌었다.
굴곡 없는 삶만큼 지루한 삶이 있을까?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 책도 읽고, 여행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추억도 쌓았다.
나만의 스토리로 승부하라는 이력서 한 장에는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앞으로의 내 인생이 유럽에 있을지 아니면 남미에 있을지, 어디일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은 외국어 실력을 더 쌓아야 답이 나올 것 같다.
나답게 살고, 나만의 길을 가고 싶다.
내 고유의 속도로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이다.
도전하니까 청춘이다.
※ 이 내용은 <왕햄스터의 쳇바퀴돌리기> 블로그에 올린 것을 옮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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