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 고타마에게.
여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이마를 찡그리며 흑판을 올려다본다.
자, 읽어봐요.
알이 두꺼운 은테 안경을 낀 남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여자는 입술을 달싹인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여자는 입술을 벌렸다 다문다. 숨을 멈췄다 깊이 들이마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겠다는 듯, 남자가 흑판 쪽으로 한발 물러서며 말한다.
읽어요.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여자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다른 장소로 옮겨져 있기를 바라는 듯이.
흰 백묵 자국이 깊게 박힌 손가락으로 남자는 안경을 고쳐쓴다.
어서, 말해요.
이십 년 전, 모국어가 아닌 낯선 외국어가 침묵을 깨뜨리리라고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지금 그녀가 이 사설 아카데미에서 고대 희랍어를 배우는 것은,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함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원서로 읽기를 원하는 플라톤과 호메로스와 헤로도투스, 속화된 헬라어로 쓰인 후대의 문헌들에 그녀는 거의 무관심하다. 더 낯선 문자를 쓰는 버마어나 산스크리트어 강좌가 개설되어 있었다면 주저없이 그것들을 들었을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무슨 수업을 하느냐구요.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희랍어 초급반을, 금요일에는 플라톤을 원전 강독하는 중급반을 가르칩니다. 한 반의 수강생은 많아야 여덟 명을 넘지 않습니다. 서양 철학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들,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이 섞여 있습니다.
동기가 어떻든,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아마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일 테지요. 오래전에 죽은 말, 구어口語로 소통할 수 없는 말이라서일까요. 침묵과 수줍은 망설임, 덤덤하게 반응하는 웃음으로 강의실의 공기는 서서히 덥혀지고, 서서히 식어갑니다.
¨¨ 앙코르와트에요. 어제 새벽에 돌아왔습니다. 사박오일 여름휴가를 미리 냈어요. 피곤해서 오늘 수업은 빠질까도 했는데, 두 주 거푸 빠지는 건 수강료가 아까워서 말이죠. 허허, 체력은 아직 쓸 만하죠. 주말마다 산에 다니니까.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얼굴이 탔다고들 하네요. 그럼요, 거기 더운 건 여기하고 비교 못 합니다. 매일 스콜이 한 번씩 지나가는데, 그런다고 딱히 시원해지는 것도 아니고, ¨¨ 뭐 그냥, 페허에 대한 흥미죠. 고대 크메르 문자가 사원의 돌에 새겨져 있던데, 개인적으론 고대 희랍 문자보다 더 보기 좋더군요.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들의 상象이 맺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한강 『희랍어 시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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