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
- 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 만큼 성장하자 나는 당황했다. 내가 딛고 선 출발선은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더구나 그 호의적이지 않은 삶은 내가 빨리 존재의 불리함을 깨닫고 거기에 대비해주기를 흥미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삶의 비밀에 빨리 다가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어른들이 나를 귀여워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자기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밀을 저당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귀여워할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런 비굴함이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다.
내가 어른들의 비밀에 쉽게 접근한 것은 바로 어린애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어린애로 보이기'때문이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다루기 쉽도록 어린애를 그저 어린애로만 보려는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린애로 보이기 위해서는 예쁘다거나 영리하다거나 하는 단순한 특기만으로 충분하다.
또 한 가지 내가 어른들의 비밀에 접근하는 방법은 관찰이다. 할머니가 늘 칭찬하는 대로 나는 눈썰미가 있는데다 내가 본 것들을 내 나름대로 분석하는 데 흥미를 갖고 있다. 이따금 나는 동정심, 의리, 탐욕 등 사람의 마음속을 헝클어놓는 것들에 대해 실험을 하기도 한다. 이모 같은 만만한 상대나 장군이처럼 내가 하찮게 여기는 동급생들이 주로 대상이 되는데, 그런 실험은 내게 어른들의 비밀을 해석하는 통찰력을 길러준다.
나에게도 귀와 눈이 있다는 것 따위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들은 할머니가 들어오실까봐 바깥 기척에만 신경을 쓰며 내 앞에서는 드러내놓고 그 얘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자기들의 얘기를 더욱 실감나고 흥미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라는 물증을 수시로 흘깃흘깃 두드려보고 뒤집어보고 흔들어보면서...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그날 당장 이모는 영어 과외교실로 그 편지를 들고 갔다. 학생들에게 '독일어는 울고 들어갔다가 웃고 나오고 영어는 웃고 들어갔다가 울고 나온다'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외국어 학습에 관한 최대의 금언이기라도 한 것처럼 인용하면서 이모는 이번 경험을 통해 영어가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음을 강조하느 한편 그럼에도 편지를 훌륭하게 완성한 자기의 영어실력에 대한 감탄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 편지를 학생들 앞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어주었음은 물론이요, 영어 발음이 좀 되는 학생들의 리딩 연습에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작년 이맘때 우리 학교에 새로 전학 온 남자애가 하나 있었다. 군수 아들인데다 얼굴이 귀공자처럼 잘생기고 공부도 잘했는데 바로 반 반장인 김범진이란 아이였다. 여자애들한테 그애의 인기는 굉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만은 예외였다. 처음에는 나도 그애의 깨끗한 서울 말씨와 하얀 얼굴에서 도시에 대한 동경심을 자극받았다. 그러나 그애가 아직은 관찰단계로서 상대에 대한 총체적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나에게 친하고 싶다는 눈길을 노골적으로 자주 주었고, 시종일관 쌀쌀맞게 대하는 내 작전에 말려들어서 내 환심을 사려고 애를 태웠기 때문에, 얼마 안 가 나에게 시시한 존재가 되었다. 학급회의 시간에 내가 손을 들면 더듬거리면서 내 이름을 지목하는 걸 보며 나는 그애의 잘생긴 얼굴 속에서 바보스러운 갈망을 보는 것이었다.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약점이 생기고 어리석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애는 결국 내 마음을 끝까지 붙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애에 대한 장군이의 질투심은 같잖게도 꽤 집요한 것이었다. 나와의 관계를 견제하는 부질없는 질투심이기도 했지만 반장이 갖추고 있는 조건을 질투하는 열등감이기도 했다.
은희경 『새의 선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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